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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구석구석 43 … 옹주물

기사승인 2022.11.10  1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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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이 된 정휘. 그의 애절한 사연이 ‘감성도시, 김포’와 오버랩 되는 곳

김포는 ‘수로도시’다. 2천년대 초반, 김포한강신도시 개발 당시 혹자들은 ‘16km의 수로를 따라 흐르는 감성도시’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감성도시, 김포’ 참으로 낭만적이 아닐 수 없다.

낭만이란 본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를 말하는데, 우리 김포 구석구석에는 이런 곳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또한 이 지역에 사는 우리의 남다른 복이리라.

이처럼 남다른 복을 받는 우리. 이에 ‘감성도시, 김포’를 더욱 감성으로 이끄는 인물을 이번 김포 구석구석에서 소개할까 한다. '감성도시. 김포'를 더욱 감성이 어리게 하는 전설이된 실존 인물 정휘옹주에 관한 이야기.  지금부터 그의 애절한 사연이 오버랩 되는 그곳에서 김포 구석구석 마흔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 이승에서의 덕망, 저승으로 이어져 … ‘옹주물’에 얽힌 이야기

경기도 김포시 옹주물로 82. 오늘의 주인공 ‘옹주물’이 있는 곳이다. 각종 포털에서 이 주소를 검색하면 ‘옛골토성’이라는 맛집이 나온다. 혹자들은 잘 못 알았나 의심하겠지만, 정확히 맞게 조회한 거다. 옹주물은 이 식당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은 우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자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옹주(翁主)라 함은 임금의 후궁에서 태어난 왕녀를 뜻한다. 즉, 오늘 찾은 ‘옹주물’은 왕녀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흔하게 들리는 전설은 요약했다.

옛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던 옹주가 있었다. 옹주는 덕양과 지혜, 그리고 영특함을 겸비해 임금은 물론 많은 이에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해 나라에 가뭄이 시작된다. 백성들은 비가 내리기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무심한 하늘은 비를 내리기는커녕 옹주의 생명만 앗아간다.

슬픔에 빠진 임금은 총애하던 옹주의 넋을 기리고자 가현산 인근에 묫자리를 잡는다. 임금의 명을 받은 상여 행렬은 지금의 감정동에서 숨을 고른 후 다시 출발하려 채비를 서두른다. 그때, 느닷없이 상여 다리가 부러지는데…. 당황한 상여꾼들은 더 이상 장지로 갈 수 없게 되자 인근 산에 옹주를 안장한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니 목도 타고 힘도 기진한 상태로 물을 찾기 위해 여러 물구덩이를 팠다. 조선팔도가 가뭄으로 시달릴 때라 물구덩이 또한 바짝 말라 더는 기대하기 힘들던 차에 근처 작은 구멍에서 갑자기 많은 물이 솟기 시작하더란다. 이를 두고 상여꾼들은 옹주의 덕망이 하늘을 닿아 은혜를 내린 물이라 여기며, 옹주의 명복을 빌었다는 전설이 ‘옹주물’에 전해진다.

   
▲ 경기도 김포시 옹주물로 82에 위치한 옹주물 터.

■ ‘옹주물’과 ‘구두물’ 그리고 ‘감정동’에 얽힌 이야기

여기서 잠깐! 감성을 뒤로하고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바로 ‘옹주물’이 자리해 있는 ‘감정동’에 대한 지명이다.

감정동의 감(坎)은 구덩이를 일컫는데, 고어로는 ‘굳’이다. 정(井)은 뜻 그대로 우물을 가리킨다. 즉, 감정(坎井) ‘굳우물’로 해석되는데 『김포군지명유래집』에 따르면 감정동의 지명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계문화유산 김포 장릉을 공사할 때 광중(壙中:무덤의 구덩이 부분)을 파니 물이 솟아 능터로 지정한 지관에게 사실을 알렸다. 지관이 풍무리 쪽 능선을 지팡이로 찌르자 샘이 솟구치고 광중이 물이 잦아 산역(山役:뫼를 만들거나 이장하는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이어 예방책으로 물줄기를 따라 감정리에 이르러 아홉 곳에 우물을 파 장릉의 물줄기를 완전히 잡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구우물이라 불려야 했으나, 복합어인 ‘구(아홉)+우물’을 만들 때 ~의(사잇시옷)을 넣어 ‘굿+우물’이 되었으며, 이를 발음식 그대로 표기하면 ‘굳우물’로 변천했다.

‘굳우물’은 순 우리말로 한자식 표기할 때 ‘굳’이 아홉 구(九)가 아닌 구덩이 감(坎)으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추정이 든다. 이유인즉슨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시 군내면의 법정 감정리가 되었기 으로(『고지도에 그려진 김포의 땅이름』 154p.) 지금 우리가 '구두물'로 부르는 곳이다.

   
▲ 옹주물 터 건너편.

■ 전설이 된 정휘. 그의 애절한 사연이 ‘감성도시, 김포’와 오버랩 되는 곳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김포시는 올해 5월 뜻깊은 일을 벌였다. ‘옹주물’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홍보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 향토사학자 조시현 선생의 사료를 바탕으로 ‘옹주물’이 재조명됐다.

조시현 선생에 따르면 ‘옹주물’의 주인공이던 ‘옹주’는 조선 선조의 여섯째 달이 정휘옹주라 한다. 전설이 아닌 실존 인물이다. 정휘옹주는 14세에 혼인했으나 시조부인 유영경의 탄핵으로 시어머니와 새로운 거처를 옮기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 김포 감정동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작은 토담집을 마련하고 약 8년을 기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옹주물’은 ‘정휘옹주의 집 앞 우물’이라고도 하고, ‘옹주가 마신 우물인 옹주우물’이라고 해 ‘옹주물’이라 불렸다 것이다.

김포시는 이곳 인근 금빛근린공원(장기동 2200번지)에 옹주의 기념물을 세우고 주위에 모란꽃을 심었다. 그리고 옹주의 애절한 전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지냈던, 아니 모르고 지냈던 우리만의 감성을 재발견한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늦었을 때가 적기라는 말처럼 지금이라도 움직여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 장기동 금빛근린공원 내에 설치된 옹주 조형물.

옹주물에서 바라본 김포한강신도시는 참으로 예쁘다. 아니 너무도 감성적이다. 정휘가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시조부의 탄핵에 떠밀려 오게 된 이곳. 앞마당 우물물을 기르며 능선 넘어 보일 듯, 잡힐 듯한 한양의 부모님을 그리며 눈물짓지나 않았을는지. 그 눈물이 고이고 고여 우물이 된 것은 아닌지. 정휘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휘의 넋을, 혹은 그의 애절한 사연을 놓치지 않고 지금이라도 이름을 불러주고 또 불러주는 일. 그리고 정휘의 숨결이 담긴 이곳을 찾고 또 찾아 그와 만나는 일. 마지막으로 정휘에 얽힌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줘 기록에 남기는 일 등이 아닐까 싶다.

감정동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옹주물’. 그리고 최근 금빛근린공원 내 마련된 소박한 옹주의 조형물.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쉼 없이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 420여 년 전, 주군의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어린 정휘가 뛰어논다. 그리고 과거와 지금의 아이들이 ‘감성도시 김포’에 오버랩 된다.

ps.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년 ~ 1653년 음력 윤7월 15일) : 조선 중기의 왕족. 선조와 인빈 김씨의 막내딸로 14세 때 유영경의 손자이자 유열의 아들인 유정량과 혼인한다. 그러나 조부가 탄핵되자 시모와 우리 김포에 정착해 약 8년간 거주했다.

   
▲ '옹주물'에서 바라본 김포도심.
   
▲ 옹주물 터.
   
 
   
▲ 금빛근로공원 입구.

 

 

 

 

양미희 기자 suho@cit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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