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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의 사는 이야기> 부부의 행복 지수

기사승인 2024.05.09  09: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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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호 청석학원 원장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 에이브러햄 링컨 –

내가 집에서 설거지를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 10년쯤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보통 집에서 부엌일을 남자가 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늘 밖으로 나돌면서 집사람이 밥을 하는 모습이나 밥을 먹은 후 치우는 모습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여겨 본 적도 없습니다.

내가 밖으로 나돌던 일이 없어지고 집에서 사무실로 마눌만 쫓아다니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휴일이면 온종일 마눌과 함께 집에 있게 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마눌은 거실에서 TV를 보거나 집안일을 보거나 하고, 전 제 방에서 컴퓨터나 책 보기를 합니다. 물을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거실에 나와 주방으로 가서 볼일을 봅니다.

그때 제 눈에 주방 싱크대 안에 아침에 먹은 밥그릇과 수저, 젓가락, 반찬 접시가 보였습니다. 단둘이 먹는 설거지라 그릇도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 본 그 모습이 점심을 먹을 때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마눌은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TV만 봅니다. “좀 치우지요” 한마디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내 방에 들어온 나는 마눌의 심리를 살피느라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생각 끝에 저건 설거지가 힘든 것이 아니라 귀찮은 것이다. 혹시 나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더 확장해 생각하면 반복된 건조한 삶에 멀미가 나서 심리적으로 어지러운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눌의 문제가 나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그간의 내 잘못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처음으로 마눌의 처지를 생각해 낸 저는 자아비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함께 출근하고 함께 일하고 퇴근합니다. 퇴근하면 다시 가사노동을 시작하는 마눌의 그 고단하고 지루한 삶을 생각하게 되면서 자신에게 부끄러웠습니다. 마눌이 설거지 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그 순서와 방법을 가늠하다 며칠 후부터 제가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매번 열심히 설거지를 하며 일주일을 보내며 알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귀찮고 지루한 일인지.

그리고 처음 설거지를 배우면서 얻은 교훈도 있었습니다. 처음하는 설거지라서 고무장갑을 끼고 하다 보면 사기그릇들이 자꾸 손에서 미끌어져 떨어지며 다른 그릇에 부딪치게 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로 세게 부딛친 그릇들은 겉으론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금이 가 있었습니다. 마눌이 그릇들을 두드려가며 금이 간 그릇의 소리가 다른 것을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전혀 분간을 할 수 없는 그릇인데 멀쩡한 그릇과 금이 간 그릇은 소리가 달랐습니다. 혹여 우리 부부 사이가 겉보기와 달리 저렇게 금이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정신이 퍼득 들었습니다.

설거지를 시작하고 나서 이 주일이 지난 후에, 마눌에게 고백했습니다. 마눌의 짜증나고 지루한 집안의 일거리들을 여지껏 무심하게 방관자처럼 행동한 일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뭘 갑자기 왜 이러느냐며 웃어 넘겼지만 그 뒤 마눌의 변화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부부의 정서를 가늠하는 행복지수의 성감대가 싱크대 설거지통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마눌의 가장 큰 변화는 퇴근 후 거실에 앉아 있을 때나 밥상머리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감정의 변화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마음 속으로 겪은 상실감과 수시로 떠 오르던 낭패감 등을 말하며 위로를 청해 온 것입니다.

특히 8남매의 장녀로 고향집을 홀로 지키는 나이 드신 노모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통 내게 내색을 안 하던 터라 그 마음 속의 애통함이나 상실감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도 자진해서 시골집에 장모님 뵈러 내려가자고 먼저 청하기도 하면서 나이 60살이 넘어서 무심한 초보 남편의 단계를 벗어났습니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함께 견지낚시를 시작해서 마눌도 낚시의 맛을 아는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 십년을 낚시하던 저와 살면서도 낚시를 즐길 줄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그날 설거지에 대한 각성이 없었다면 갱년기 이후 서로에게 무심하게 바라보기 만 하는 속으로 금이 간 늙은 부부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다시 찾아온 화학적 결합을 하게 해 준 설거지에 대한 각성은 지금 생각해도 제겐 기특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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